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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자가 남은자 에게..

navy79 2006. 3. 4. 23:55


 

2003년 9월 24일.

오늘 저는 피를 토할 비통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약관의 나이 25세에 입사하여 20년 9개월 동안 밑 바닥 부터 시작해

젊은 청춘을 다 바친 고우나 미우나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던 정든 회사를 마감하며,

제 열의를 다해서 열심히 일했지만

"민주" 를 외쳤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제 타의에 의하여 떠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나는 누구를 탔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든게 제 잘못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분명 제 인생이 "D" 등급이 아니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말할수 있고 오히려 "D" 등급이 훈장처럼 자랑스럽습니다.

나에게 "D" 고과를 준 인생 "F" 등급의 관리자들,

그들도 강제퇴직의 아픔 에서 자유로울 자가 그 누가 있을까요?

지금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나는 항상 모든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 앞에서도 떳떳 했으며 눈치 안보며 할말 다할수 있었습니다. 


 

진달래가 온 산야에 붉게 물들던 2월말 

노동운동을 했다는 단 한가지 이유 만으로 

갑자기 부당 발령을 받았지만 모든걸 받아들이고,

이제 여기에서 제대해야지 하고 생각 하던게 씨가 되어

회사로 부터 명퇴 아닌 명퇴의 압박을 받아

본의 아니게 갑자기 여기를 떠나려 합니다.

더 이상 구차하게 남아 있겠다고 하면 인생 초라 해지겠지요.

 

들판에 벼들이 누렇게 물드는 9월의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며 50분간 김제평야를 가로지르며

출퇴근 하던 지난 몇 개월간이 그리워 질것입니다.

 

어제는 퇴근길에 오래간만에 빵을 몇 개 사서 들고 집에 들어갔지요.

애비의 타는 속도모르는 철없는 어린것들이 빵 봉지를 보면서 좋아하더군요.

순간 무어라 형언 할수 없는 비애감이 밀려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언제다시 회사에 출,퇴근하며 이런 새끼들의 모습을 볼수 있을런지...

문득 작년 12월초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류방상, 강상구 동지의 그 열변,

너무 여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조합원 들 에게

눈물로 호소하던 이영주 동지의 모습들이 이젠 추억이 돼버렸고 아쉬움만 남습니다.

그나마 중앙, 지방본부를 2번으로 선택해주셨던 우리의 조합원님들,

그리고 지부선거에서 저에게 표를 던져주신 분들,

 

아니 저에게 표를 주시지 않았던 모든 분들 에게도

간 고마웠다고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저는 담담한 심정으로,

제가 마지막으로 꼭 해주어야할 급한 지출결의 들을 마치고

모든 퇴직서류 들을 퇴근 시간 넘게 쓰고 도장을 찍어 서랍에 넣어 두었습니다.

내일 제출해야지요.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으니 내가 안나간다고 버티면 그만이고,

내가 나간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D" 를 맞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안 나가면 내 모습은 한없이 초라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항상 내가 주장하고 바라던 내발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갈수가 없겠지요.

모든 일은 들어 올때 보다 나갈 때가,

시작 할때 보다 끝날때가 중요 하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나가면 후임은 없다고 과장님이 한숨을 쉬더군요.

도대체 그 많은 일들을 과장포함 셋이서 어떻게 할까?

 

마치 KT 의 앞날을 보는 것 같아 암담하기만 합니다.

하기야 내가 그걸 걱정할 처지 이겠습니까?

그건 남은자들 의 몫이고

원폭에 피폭되면 살아남은 자들이

고통 없이 순간적으로 죽어 버린 자 를 부러워한다고,

회사에 남은 분들이 이번에 나간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사라는 조직은,

일을 잘하는 사람,

중간인 사람,

못하는 사람 들이

적당히 모여서 움직이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래야만이 윤활유를 친 기어처럼 맞물려 잘 돌아가는 것이지요.

아무리 구조조정을 하여 사람을 내보내고,

경영을 합리화 하고, 기구를 통폐합하여 축소 해본들 무슨 소용입니까?

일을 할만한 사람들은 자의, 타의로 나가고

진짜로 나가야할 사람들은

구렁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버티고 있는데

 

회사에서는 그들을 손도 대지 못하고 있고,

실패한 사업들에 책임지는 자들은 없으며 오히려 승진하고 호의 호식 하고, 

고목나무에 조화를 걸어 놓고 꽃이 예쁘다고 떠들어 본들,

뿌리가 썩었는데 몸통이 성 할리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나가지만 이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곧 제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나이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미리 준비하세요.

저는 15년 전 부터 준비했으며 올해 8월 달까지 학교를 다니며 자격증을 땄고

개인적으로 사회 경험도 많아서 퇴직에 대한 두려움에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아무런 준비나 대책 없이 밀려서 나가는 동료들이 걱정입니다.

 

2억 정도의 돈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것 이지요.

사업 한답시고 한번 삐끗 실패하면 끝 입니다.

누가 퇴직금 받았네 하면 손 벌리는 친척이나 사기꾼도 많이 꼬이니 그것도 조심할 일이지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네요.

하기야 18년을 돌아보면 그러기도 하겠지만...


끝으로 전북지역 민주동지회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여러분과 남아서 끝까지 투쟁하지 못함을 부끄럽고 가슴아프게 생각 하고

공식적인 KT 의 노동자로서 마지막 글을 올리며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며...

 


 


             2003년 9월 마지막 날에... “면도날" 배상